Curatorial statements
_박소라

01

사회적 믿음과 불안 사이를 횡단하는 방법: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글_이요정



박소라는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을 전개한다. 작가는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번아웃, 우울 등의 감정과 성과주의적 풍토에 대해 탐구하고, 한국 사회가 가진 신자유주의적 열망을 극대화하여 제시한다.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믿음과 불신의 경계에 서 있다. 사람들은 치열한 자기계발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동시에 그 믿음이 보답받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함께 가지고 살아간다. 개인의 노력과 성과를 알아줄 자본주의적 보상 체계를 신뢰하는 한편, 그 체계가 자신을 배신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있는 개인의 불안은 이렇게 형성된다. 이때의 불안은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잠을 줄여서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성공신화는 사회 구성원들을 몰아붙이고, 불안한 주체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사람들은 사회 전반에 깔린 분위기를 읽고 같은 종류의 불안을 전달받는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형성된 불안이라는 정동은 개별 주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힘으로 작동하며, 이는 채 인지되기도 전에 신체를 감응시킨다.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는 주체들은 이러한 상황을 감내할 뿐이다. 홀로 ‘도태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은 OECD 평균에 비해 현저히 긴 노동 시간과 높은 자살률을 묵인한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주체들은 믿음과 불신의 경계에서 불안을 통과하며, 사회적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각을 시시각각 재조율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주체의 삶을 지탱하는 동시에 그를 소진시킨다.

작가는 설치, 도자, 영상 등 여러 매체를 넘나드는 시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위의 주제를 표현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형식은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모형, 즉  ‘목업(Mockup)’이다. 작가의 작업은 전시된 작품인 동시에 생산성에 대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사용되는 소도구로서 가상의 사용자를 상정한 ‘제품’이 된다. 감상자는 전시를 관람하는 주체로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지만, 동시에 해당 ‘제품’을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신자유주의 행동강령에 따를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받고 이를 실제로 사용했을 때의 효과에 대해 떠올린다. 감상자는 이러한 아이러니한 경험을 통해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인 요구와 더불어 인간의 본질적인 영역에 대한 기술의 거침없는 개입을 확인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가는  현재의 상황을 극대화하여 가능할 수도 있는 미래의 상황을 제시하고, 이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현재 사회에 만연한 현상과 그에 따른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이러한 접근은 철저하게 “가능할 수도 있는 미래”의 영역에 근거하여 에측되고, 따라서 사변성을 띤다.[1] 작가의 작품은 미래의 가상 시나리오에서 소비되고 사용되는 도구로서, 기술이 상상 속의 있을 법한 일상에 적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미리 살펴보는 매개가 된다.[2]

작가는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기술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고찰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부여받았으나, 이는 다시 효율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사회적 압박과 이에 따른 주체의 욕망 아래 종속된다. 신자유주의적 욕망은 정신과 신체의 증강에 대한 수요로 이어지는데, 이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종전과는 다른 것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작가는 깊고 짧은 수면(〈Style your Sleep〉), 피로하지 않은 몸(〈에너지 드링크가 필요한 사회〉 연작), 생산성을 높여주는 긍정적인 마음가짐(〈Smile!〉) 등 동시대적 ‘갓생’을 위한 보조 도구들을 디자인한다. 인간 주체는 앞서 언급한 도구들에 의존하여 자신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방향에 맞추어 교정한다. 인간 스스로가 기술을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개입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에 대한 이러한 의존성은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사회 아래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압박감이라는 정동에 대한 반작용이나 다름 없다.

[1]  앤서니 던, 피오나 라비, 스페큘러티브 디자인, 강예진 역, 안그라픽스, 2024, p. 89
[2]  위의 책, p. 19





02

사변성이 현실을 가리킬 때

글_김현주



SF가 과학 소설의 약자로 오해되는 일은 적지 않다. 그렇다면 흔히 SF(Speculative Fiction)로 지칭되는 장르는 Sci-Fi와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 다코 수빈(Darko Suvin)은 SF를 ‘인지적 소격(cognitive estrangement)’의 문학으로 정의하는데,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합리적 외삽(外揷, extrapolation)에 바탕을 두고, 개념적이거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가능성을 탐색하기 때문이다.[1] 다시 말하면, SF는 특유의 비현실적인 소재나 발상을 통해 독자가 현실을 재인식하도록 역설한다. 현존 인류를 훨씬 웃도는 과학문명이나 기술을 다루기보다 기술적 포화 상태에 이른 사회가 보일 법한 디스토피아, 혹은 갈등 상황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주요 제재는 현실에서는 다소 터무니없는 발상으로 보이지만 작품이 표상하는 세계에서는 상식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제목 역시 작품이 발생한 세계에서는 당연한 고유어나 전제를 가져오고는 한다. 핸드메이든이 그러하고, 가타카가 그러하고 블레이드 러너가 그러하다. 독자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예컨대 유전자나 타고난 인자를 분석해 만들어진 극단적 통제사회라는 픽션에 현실의 특정한 부분들을 겹쳐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와 영상매체가 아닌 시각예술이 담지하는 사변성은 어떤가. 장문의 텍스트와 몇시간의 영상이 전달하는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서사가 소거된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인상을 남길 수 있을까? 이러한 우려섞인 질문에 박소라 작가는 <에너지 드링크가 필요한 사회> 연작과 <버닝 러너>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인 <에너지 드링크가 필요한 사회> 연작은 제스모나이트와 알루미늄으로 조형되었다. 시판되는 알약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진 알약들은 자체로 이질적인 동시에 견고한 물성이 수반하는 분명한 존재감을 가진다. 이에 더해 표면에 새겨진 10,000mg의 카페인은 일일 최대 섭취권고량인 400mg을 가볍게 넘는 수치다. 크기와 내용 모두 과장된 조각은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위기감을 심어준다. 정말 10,000mg의 카페인을 정제해 파는 제약 회사도 그걸 기꺼이 씹어 삼킬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슷한 상품과 이를 알아서 찾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019년 이래로 작가의 작업 경향은 ‘휴식이나 수면이 하나의 재화로서 기능하는 사회’와 그 사회 안의 ‘상품’이라는 두가지 축으로 이해된다.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카페인 섭취는 현대인에게 특별할 것 없는 일이다. 업무와 일상 전반에서 휴식을 제한하고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인 미덕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개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체와 능률을 개선하고 제고하고자 한다. 에너지 드링크와 같은 각성제를 자발적으로 찾아나서는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는 은연 중에 새로운 규범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출품작인 <버닝 러너>는 수채 드로잉으로,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방적 신뢰를 보여준다. 개인은 각성제를 섭취해 깨어있으려 하고, 높은 업무 능률을 보임으로써 스스로의 효용을 증명하고자 한다. 더 오래 깨어있는, 다른 사람보다 쓸모있는 존재가 되면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안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마저도 스스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한데, 경쟁에서 밀려나서는 안된다는 불안과 욕망 역시 사회에 의해 주입되고 개인들에 의해 재생산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 세계 전반을 통해 신체증강을 위한 웨어러블 디바이스나 제품이 판매되는 가상의 사회를 가정하면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조성하는 ‘당연한’ 분위기를 지적하고 있다. 작품이 전제하는 일그러진 사회, 즉 사변의 세계가 상상의 산물이면서도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할 수 있는 기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대 작품의 사변성은 무엇의 반작용인가? 우리가 다른 의미에서 깨어있고자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1] 이원진, 「21세기 사변의 두 흐름: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과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의 만남 - 팬데믹 ‘실재’와 맞닥뜨린 인류를 위한 철학과 문학의 사변적 협력」 , 『비평문학』 (2022. 3), p.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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