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ial statements
_박관우
01
글_안준태
숨이 닿는 거리. 손과 손 사이 따끔거리는 적막. 그리고 고요한 긴장을 깨는 누군가. 어떤 사람이든 상황이 자신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면 당황할 것이다. 특히, 미술관이라는 하얀색 직육면체의 공간에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약속한 행위들을 어기게 되면 그는 곧 따가운 시선과 질타를 받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제도와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고 설계한다. 예측된 행동은 우리의 경험을 주도하고, 주도된 경험은 일률적인 감각을 동반한다.
그러나 암묵적인 제도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앞선 모든 경험과 감각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박관우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순간에 집중한다. 약속된 제도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예측 가능한 행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그의 작업은, 관객이 더 이상 익숙한 감각에 의존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을 형성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물 전반에는 정동[1]개념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그의 작업은 비일상의 경계로서 예술을 활용함으로써, 관객의 신체에 설명 이전의 정동을 먼저 발생시킨다. 이로써 작업은 관객의 일상적 인식 흐름을 잠시 중단시키며, 감각이 먼저 반응하는 경험의 순간을 열어 보인다. 여기서 정동은 설명과 해석이 중심이 되는 미술관이라는 제도 공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작동한다. 박관우의 작업은 관객이 작품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신체가 반응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예술 경험의 순서를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작가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작업인 <도슨트 프로그램>은 단순히 같이 진행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도슨트가 관객에게 설명해주는 작업이다. 다만 관객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도슨트와 관객 단 둘이서만 진행되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도슨트와 관객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는 점이 기존의 도슨트 프로그램과는 다르다. 이 프로그램 안에서 도슨트는 ‘인터프리터’ 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관객과 소통하는 미지의 존재로 작동한다. 기존의 미술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도슨트 프로그램에서는 전시된 작품들을 읽으며 지식을 제공받고, 서로 간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도 꽤나 떨어진 채 진행된다. 그러나 이 <도슨트 프로그램>에서는 둘 간의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진 채 작품을 감상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인터프리터는 크게 네 가지의 규칙을 따르며 관객과 움직인다.
1. (관객을) 이름으로 불러라.
2. (관객과) 비밀을 나누어라.
3. (관객과) 체온을 나누어라.
4. 오늘은 유일한, 마지막 하루다.
분명 우리가 알고 있던 도슨트의 지시사항과는 사뭇 다른 형태이다. 이 작품에서 도슨트는 관객에게 미지의 존재이다. 사회적인 약속을 깨고 자신에게 침입하는 도슨트의 행위들을 관객은 끝까지, 아마 평생—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모를 것이다. 관객은 그저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에 침투하는 인터프리터를 바라보며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신체의 알 수 없는 대답만을 느끼며 이 프로그램을 들어야한다. 박관우는 관객의 정동을 의도적으로 끌어내며 관객을 일상 너머의 비일상으로 유도한다.이 과정에서 관객은 더 이상 전시를 ‘이해하는 존재’로 머물 수 없다. 설명을 듣는 동안 관객의 신체는 스스로 반응하고, 판단 이전의 감각은 계속해서 긴장 상태에 놓인다. 이때 관객은 미술관에서 익숙하게 요구되던 관람자의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인터프리터의 존재는 그러한 태도를 지속적으로 무력화시킨다.
이러한 작업은 사회적으로는 암묵적 합의를, 개인적으로는 믿음을 깨는 형태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뇌에서 벌어지는 능동추론[2]을 바탕으로 자신의 환경을 구성한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은 관객을 주도하는 경험을 설계하여 우리가 쉽게 믿어왔던 제도에 질문을 던진다.
작가의 작업은 제도와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한없이 작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반발을 일으킨다. 탄탄한 이론 위에서 정교하게 관객의 미적 경험을 조직하는 작가의 작업은 관객의 사고방식을 환기시키는 개념미술적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동시에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정동의 순간들은 우리가 믿어온 제도가 얼마나 빈약한 기반 위에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만든다.
[1]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설명할 수 없는 몸의 감정.
[2] 뇌가 외부의 자극과 예측 모델 간의 차이를 줄여나가는 과정. 현대 뇌과학의 주된 이론 중 하나.
02
글_이경민
‘현실’이란 익숙한 감각 속에서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이나, 때로는 이 익숙했던 감각이 갑자기 낯설어지며,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현실이 미묘하게 어긋나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 미시적인 낯섦의 감각은 세계가 갑자기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던 감각의 전제가 잠시 흔들릴 때 발생한다. 박관우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흔들림이 발생하는 조건을 정교하게 구성하고, 그 틈에서 새로운 경험이 발생하도록 장치를 설계한다.
작가의 작업은 조각, 영상, 가상현실,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들은 형식의 차이를 드러내기보다, 일상적으로는 경험하기 어려운 감각의 조건을 구성하는 데 사용된다. 시간차를 둔 ‘지금’을 마주하게 하거나, 스스로는 직접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경험하게 만드는 방식이 그 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을 통해 관객의 인식과 신뢰가 어떻게 재배치되고, 그로 인해 어떤 감각적·관계적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이다. 이러한 관점은 ‘구성된 상황’이라는 작업 방식으로 확장되며, 관객은 그 안에서 사건을 겪고 작품을 구성하는 주체가 된다. 이 작업론은 <녹색등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녹색등대>에서 죽음을 종결이나 사망이 아닌 하나의 ‘종료’로 바라보는 태도를 취한다. 죽음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유할 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여는 계기로 전환되며, 삶과 죽음을 단절된 사건으로 보지 않게 만든다. 이러한 작가의 사변적 태도는 ‘2052년의 이주사건’이라는 가설로 구체화되며, 인간이 신체를 벗어나 ‘뉴-이데아’라는 가상적 공간으로 이주한다는 <녹색등대>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 세계는 증언, 협약, 사건 기록, 반소설적 텍스트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구축된다.)
이 세계관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더블채널 영상 작업 <달콤한 꿈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놓인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프로젝트 <래빗홀2052>에 참여했던 주체들로, 작품의 세계관 아래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고 5주간의 집단 심리극[1]에 참여했던 ‘가네모토 하미’와 ‘김상식’이라는 인물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대본 없이 배경과 질문, 몇 가지 조건만이 주어진 상태에서 세계관 속 정체성으로 즉흥적으로 발화하고 행동하며 작품을 구성한다. 이때 생성되는 발화는 미리 정해진 서사가 아니라, 허구적 세계관 속에서 실제로 겪은 경험과 감각이 중첩된 결과다.
관객이 이 영상에서 마주하는 것은 허구의 세계관 속 설정을 연기하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강한 정동을 동반해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경험은 어디까지를 허구로, 어디서부터를 실재로 구분할 수 있을까. 허구적 설정 안에서 발생한 일이라 하더라도 참여자의 몸과 감각에 분명히 각인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조건 아래에서 ‘진짜’라고 받아들이고 신뢰하게 되는가. 이처럼 박관우의 작업은 진실과 거짓, 가상과 실재를 명확히 구분하기보다, 그 경계를 흐릿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구분이 성립하는 기준 자체를 되묻게 만든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건’이란 누구에게나 동일한 방식으로 공유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이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각자의 감각과 기억 속에 서로 다른 형태로 각인된다. 특히 집단 심리극이나 퍼포먼스 형식으로 진행된 작업의 경우, 그 경험은 사후 증언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러한 경험은 타인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전달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조차 온전히 회수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조건에 지속적으로 주목해왔으며, 경험이 배타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참여자에게는 분명하지만 타인에게는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속에서 어떤 감각과 관계가 생성되고, 그것이 각자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는지를 탐색해왔다.
결국 박관우의 작업은 세계를 설명하기보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해온 방식을 잠시 멈추어 세운다. 그가 예술의 틀을 빌려 마련한 장치와 상황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감각과 판단이 어떤 조건 아래에서 구성되어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의 작업에서 사건은 눈앞의 이미지나 서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 각자가 그 조건 안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관계 맺는지에 따라 저마다 다른 형태로 발생한다.
[1] 임상심리학에서 활용되는 집단 심리치료의 한 방법이나 작가는 이 구조를 작업의 형식으로 차용한다.